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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모르는 단어가 세 개나 연속으로 나왔습니다. CCL, T-글래스, 닛토보. 하나씩 찾아가며 읽다 보니, 엔비디아와 구글 뒤에 이름도 생소한 일본 유리섬유 회사가 병목으로 앉아 있다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AI 반도체 공급망의 가장 조용한 급소, 이 글에서 그 구조를 정리해봤습니다.
CCL이 뭔지 몰랐던 제가 공급망을 이해한 순서
처음에 "두산 전자BG가 CCL 공장을 증설한다"는 문장을 읽고 멈췄습니다. CCL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CCL은 동박적층판(Copper Clad Laminate)의 약자입니다. 여기서 동박적층판이란, 인쇄회로기판(PCB)을 만들 때 기초 재료로 쓰이는 얇은 판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반도체 기판의 '밑판'입니다. AI 반도체가 아무리 고성능이어도 이 판 위에 올라가야 작동하니, CCL 없이는 반도체도 없는 셈입니다.
두산 전자BG의 주력 제품이 바로 이 CCL입니다. AI 서버용 반도체 패키지 기판에 들어가는 CCL, 네트워크 장비용 CCL, 그리고 스마트폰에 쓰이는 유연성 기판 소재인 FCCL(Flexible CCL)까지 라인업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사를 다 읽고 나서야 그동안 따로따로 보이던 뉴스들이 한 줄로 연결됐습니다. AI 반도체 → 반도체 기판 → CCL → 유리섬유. 이 순서로 내려가야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
T-글래스 병목 — 엔비디아도 못 피한 유리섬유의 벽
CCL을 파고들다 보면 T-글래스라는 소재가 나옵니다. T-글래스란 열팽창계수(CTE)가 낮은 특수 유리섬유 방적사를 말합니다. 여기서 열팽창계수(CTE)란, 온도가 오를 때 소재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기판은 크기가 커질수록 열에 의한 변형 문제가 심해지는데, T-글래스는 이 팽창을 억제해 정밀도를 유지해줍니다.
문제는 이 T-글래스를 일본의 닛토보(Nittobo)가 사실상 독점 생산한다는 점입니다. 엔비디아도, 구글도, 아마존도 T-글래스를 찾고 있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올해 1분기 기준 닛토보의 T-글래스 생산능력은 50만 제곱미터(㎡)인데, 추격 중인 경쟁사들의 생산능력을 모두 합쳐도 이에 미치지 못합니다(출처: 전자신문).
경쟁사 생산능력 현황을 보면 그 격차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 타이완글래스(대만): 10만 ㎡
- 타이산글래스(중국): 5만~10만 ㎡
- 그레이스패브릭테크놀러지(중국): 10만 ㎡
- 난야플라스틱(대만): 5만 ㎡
다 더해도 30만 ㎡ 수준입니다. 닛토보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PCB 시장조사업체 프리스마크도 올해 상반기 보고서에서 T-글래스 공급 부족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출처: Prismark). 닛토보의 증설 속도보다 수요 상승 폭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구조를 보면서 예전에 반도체 소재 기사를 읽었을 때와 똑같은 감각이 왔습니다. 물건이 부족할 때 파는 쪽이 갑이 된다는 패턴, 여기서도 정확히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병목 옆자리를 차지한 두산 — 가동률 100%의 의미
두산 전자BG의 실적을 보면 이 공급망 구조가 숫자로 그대로 나타납니다. 올해 상반기 매출은 1조 2,930억 원으로, 지난해 연간 매출 1조 60억 원을 이미 넘어섰습니다. 연간 매출 목표 1조 8,750억 원의 69%를 상반기에 달성한 셈입니다.
공장 가동률을 보면 이 숫자가 왜 나왔는지 더 잘 보입니다. 증평 공장은 109.8%, 김천 공장은 102.7%로 100%를 초과합니다. 제가 처음 이 수치를 봤을 때 "100%를 어떻게 넘기지?"라고 잠깐 멈췄는데, 설비 한계 이상으로 교대 근무를 늘리거나 여유 라인을 최대로 돌리는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그 수요 압박이 더 실감났습니다.
이 실적의 핵심은 두산이 닛토보의 T-글래스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귀한 소재를 선점했다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 됩니다. 병목 소재를 직접 만드는 회사는 닛토보이고, 두산은 그 바로 다음 칸에서 그 소재를 써서 제품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병목의 혜택이 고스란히 옆으로 흘러오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KPCA쇼에서 나온 김인욱 사장의 발언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국내 증평·김천 공장 증설에 더해 태국 신공장까지 짓고, 중국을 포함한 추가 거점도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점은 얼마나 버틸까 — 두 겹의 벽과 증설 베팅
닛토보의 T-글래스 독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제가 이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오래 생각한 부분입니다.
일단 지금 당장은 독점이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는 쪽에 손이 갑니다. 이유는 두 겹의 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기술의 벽입니다. 중국 업체들이 비슷한 제품을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 성능이 못 미친다는 건 기사에 나온 내용이고, 제 경험상 소재 분야에서 성능 격차는 수치상 좁혀지는 것보다 실제 현장에서 체감되는 격차가 훨씬 클 때가 많습니다.
두 번째는 신뢰의 벽입니다. 김인욱 사장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객사가 사양을 낮추긴 어렵고, 경쟁사가 T-글래스를 개발해도 고객사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엔비디아 같은 큰손이 "이거 써도 된다"고 도장을 찍어주는 과정은 기술 개발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것과 믿음을 얻는 건 다른 일이니까요.
다만 이 부분에서 "독점이 영원히 유지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격차의 크기보다 좁혀지는 속도가 중요합니다. 중국 반도체 기사들을 읽으면서 배운 게 있다면, 지금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이 3~5년 안에 60~70% 수준까지 오는 사례를 반복해서 봤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닛토보가 증설 속도를 일부러 보수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독점 기업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공장을 대규모로 늘렸다가 수요가 꺾이면 과잉 설비가 짐이 되고, 물량이 넘치면 지금 받는 좋은 값도 지키기 어렵습니다. 부족한 상태를 적절히 유지하는 게 파는 쪽에는 오히려 유리한 전략입니다.
두산의 태국 신공장은 2028년 본격 양산이 목표입니다. 이건 "AI 반도체 호황이 2028년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베팅입니다. 앞서 SK하이닉스의 용인 공장이나 삼성의 미국 공장도 같은 시간대를 겨냥하고 있었는데, 제가 그때마다 든 생각이 이번에도 반복됩니다. 모두가 같은 미래를 보고 동시에 공장을 짓는 시점에, 그 공장들이 완성될 때 수요가 그만큼 커져 있을지가 진짜 갈림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두산 전자BG가 만드는 CCL이 AI 반도체랑 어떤 관계인가요?
A. AI 반도체는 기판 위에 올라가야 작동하고, 그 기판의 핵심 소재가 CCL(동박적층판)입니다. AI 서버에 들어가는 반도체 기판 면적이 점점 커지면서 CCL 수요도 함께 늘고 있습니다. 두산 전자BG는 이 CCL을 만드는 국내 대표 기업입니다.
Q. T-글래스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A. T-글래스는 열팽창계수(CTE)가 낮아서 고성능 AI 기판에 필수적인 소재입니다. 기판 크기가 커질수록 열변형 문제가 생기는데, T-글래스가 이를 억제해줍니다. 엔비디아, 구글, 아마존 같은 빅테크들이 T-글래스 기반 CCL만 찾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Q. 닛토보 T-글래스 독점이 곧 깨질 가능성은 있나요?
A. 빠르게 깨지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기술 격차에 더해 엔비디아 같은 고객사의 품질 승인이라는 신뢰의 벽이 추가로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국과 대만 업체들이 계속 쫓아오고 있어서, 독점 자체는 유지되더라도 그 강도가 서서히 약해지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Q. 두산 전자BG 태국 공장은 언제 완공되나요?
A. 두산 전자BG는 태국 CCL 공장을 2028년 중 본격 양산 목표로 신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2028년 이후에도 AI 반도체 수요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한 투자입니다.
결론
이 기사의 주인공은 두산이지만, 제가 읽으면서 진짜 눈이 간 곳은 그 뒤에 있는 유리섬유였습니다. AI라는 거대한 산업 밑에 기판, CCL, T-글래스로 이어지는 사슬이 있고, 그 사슬의 가장 좁은 지점에서 돈의 흐름이 결정됩니다. 두산 전자BG는 그 병목 소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덕분에 상반기에만 작년 한 해 매출을 넘겼습니다.
제가 이번에 배운 습관 하나는, 어떤 산업 기사를 봐도 "이걸 만들려면 뭐가 필요하지? 그건 누가 만들지?"를 한 칸씩 내려가며 물어보는 것입니다. 큰 이름 아래의 작은 병목이 결국 판을 좌우합니다. 증설 소식은 많지만, 그 공장들이 완성될 2028년에 수요가 기대만큼 있을지는 계속 지켜봐야 할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