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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하나 없는 회사가 삼성전자로부터 1조 2,780억 원을 받아냈습니다. 6년간 이어진 삼성전자와 넷리스트의 특허분쟁이 마침내 포괄적 합의로 마무리됐습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투자 공부를 막 시작하던 시절 "기업의 크기는 공장과 직원 수로 본다"고 믿었던 제 자신이 떠올랐습니다. 이 사례는 그 오래된 착각을 다시 한번 완전히 부숩니다.
공장 없는 회사가 1조를 받아낸 구조, 어떻게 가능했을까
넷리스트는 지난 2000년 LG반도체 출신의 홍춘기 대표가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창업한 서버용 메모리 모듈 전문 기업입니다. 직접 생산 라인을 운영하는 대신 설계와 특허 포트폴리오 구축에 집중해 온 이른바 팹리스(Fabless) 구조의 회사입니다. 여기서 팹리스란 반도체 설계만 전담하고 실제 제조는 외부에 맡기는 사업 방식을 의미합니다. 저는 처음 투자 공부를 시작할 때 이런 회사를 "실체가 없다"고 가볍게 봤는데, 지금 생각하면 꽤 무지한 판단이었습니다.
두 회사의 인연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삼성전자와 넷리스트는 공동 개발 및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고, 삼성은 넷리스트의 특허 기술을 활용해왔습니다. 그런데 2020년 넷리스트가 "삼성이 계약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계약 해지를 통보하면서 관계가 틀어졌습니다. 이후 2021년부터 본격적인 법적 분쟁이 시작됐고, 넷리스트는 미국 텍사스 동부연방지방법원에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결과는 넷리스트의 연승이었습니다. 삼성은 2023년 4월 약 3억 300만 달러, 2024년 11월 약 1억 1,800만 달러의 배상 평결을 연달아 받았습니다. 두 건을 합치면 원화로 약 6,300억 원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그런데도 삼성은 항전을 택하다가, 결국 이번에 훨씬 더 큰 규모의 합의를 선택했습니다. 이 타이밍이 저는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읽혔습니다.
이번 합의의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선급 라이선스비 2억 3,900만 달러(약 3,400억 원) 즉시 지급
- 5년간 분기별 최대 3,290만 달러씩, 총 6억 5,800만 달러(약 9,375억 원) 추가 지급
- 선급금 포함 라이선스비 총합 약 8억 9,700만 달러(약 1조 2,780억 원)
- 넷리스트에 5년간 연 최대 3억 달러 규모 D램·낸드 제품 공급 우선권 부여
- 삼성 반도체(SSI)가 넷리스트 보통주 1,000만 주를 100만 달러에 매입
크로스 라이선스(Cross License)라는 합의 방식도 눈에 띕니다. 크로스 라이선스란 두 기업이 서로의 특허를 상호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계약 구조로, 단순 배상금 지급이 아니라 기술 협력 관계를 맺는 것에 가깝습니다. 적이 파트너로 전환되는 구조라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삼성 입장에서는 서버 듀얼 인라인 메모리 모듈(DIMM)과 HBM 관련 넷리스트의 전체 특허 포트폴리오를 합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셈입니다(출처: 네이버 뉴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 HBM 슈퍼사이클과 무형자산의 무게
저는 이 합의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이 바로 타이밍이었습니다. 6,300억 원의 배상 평결을 이미 두 차례 받고도 수년을 버텨온 삼성이, 왜 지금 이 시점에 1조 원이 넘는 합의를 선택했을까요?
HBM(High Bandwidth Memory)이라는 키워드가 여기서 핵심이 됩니다. HBM이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기존 메모리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고대역폭 메모리를 뜻합니다. AI 가속기와 고성능 컴퓨팅(HPC) 서버에 필수 부품으로 쓰이면서, 현재 반도체 업계 전체를 견인하는 핵심 제품군이 됐습니다. 쉽게 말해 지금 메모리 시장에서 HBM은 실적의 심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직접 관련 자료를 살펴봤는데, HBM 시장은 2023~2025년을 기점으로 급팽창하는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슈퍼사이클 국면에서 핵심 제품의 특허 불확실성을 계속 안고 가는 비용이, 합의 비용을 뛰어넘는 순간이 온 것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분쟁 비용은 고정된 숫자가 아니라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함께 불어나는 구조라는 점을 이 사례가 잘 보여줍니다.
더 생각해보면, 이 합의 구조 안에 저로서는 예상 밖이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넷리스트가 매년 최대 3억 달러 규모의 D램과 낸드 제품을 삼성 반도체로부터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는 부분입니다. 공급이 제한된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실질적인 자산이 된다는 것을 저는 이 조항을 보고 다시 실감했습니다.
이 사례는 동시에 한국 대기업의 오래된 약점을 드러낸다고도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재무제표를 볼 때 대부분의 투자자가 매출, 영업이익, 부채비율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특허 의존 구조, 즉 핵심 기술 일부를 외부 지식재산(IP)에 기대고 있는 상황은 언제든 조 단위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잠재적 부채입니다. 지식재산(IP)이란 특허, 상표, 저작권 등 법적으로 보호되는 지적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재무제표상 무형자산 항목에 일부 반영됩니다. 1조 원의 수업료가 기술 자립 투자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미국 특허청(USPTO)에 따르면 반도체 분야의 특허 출원 건수는 2020년대 들어 AI·HPC 수요 급증과 함께 매년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출처: 미국 특허청(USPTO)). 특허를 단순한 법적 방어 수단이 아니라,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전략 자산으로 보는 시각이 그만큼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넷리스트는 어떤 회사인가요? 생산 공장은 없나요?
A. 넷리스트는 2000년 LG반도체 출신 홍춘기 대표가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에 설립한 서버용 메모리 모듈 전문 기업입니다. 직접 생산 공장을 운영하는 대신 설계와 특허 포트폴리오 구축에 집중하는 팹리스 구조로 운영됩니다. 최근에는 HBM 관련 기술과 하이브리드 DDR 메모리 솔루션 특허 확보에 특히 힘을 쏟고 있는데, 이번 분쟁의 협상력도 바로 이 특허 포트폴리오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Q. 삼성전자가 6년을 버티다가 지금 합의한 이유가 뭔가요?
A. 이미 두 차례의 배상 평결로 약 6,300억 원의 법적 책임을 진 상황에서도 항전을 택했던 삼성이 이번에 1조 2,780억 원 규모의 합의를 선택한 배경에는 HBM 슈퍼사이클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AI 수요 폭증으로 HBM이 반도체 실적의 핵심 품목이 된 지금, 관련 특허 불확실성을 계속 안고 가는 리스크 비용이 합의 비용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것으로 읽힙니다. 분쟁 비용은 사업이 커질수록 함께 불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Q.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A. 크로스 라이선스란 두 기업이 각자 보유한 특허를 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호 허가하는 계약 방식입니다. 한쪽이 배상금을 내고 끝나는 단순 합의와는 달리, 이후에도 기술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구조입니다. 이번 합의에서 삼성은 넷리스트의 DIMM, HBM 관련 전체 특허 포트폴리오를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는데, 이렇게 보면 단순한 패소라기보다 적을 파트너로 전환한 설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Q. 투자자 입장에서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A. 재무제표에 잘 드러나지 않는 특허 의존 구조가 언제든 조 단위 비용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매출이나 영업이익만큼 무형자산과 지식재산(IP) 리스크를 함께 살피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넷리스트처럼 핵심 특허를 쥔 작은 기업이 거대 기업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업 가치를 규모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보여줍니다.
결론
투자 공부를 하면서 제가 가장 오래 걸린 부분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매출과 공장, 직원 수 같은 눈에 보이는 자산으로만 기업을 판단하던 시절에는, 이런 사례가 그냥 '특이한 뉴스'로 지나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삼성-넷리스트 합의는 무형자산과 특허 포트폴리오가 거대 기업과의 협상에서 어느 정도의 레버리지를 만들어내는지를 수치로 증명했습니다.
1조 2,780억 원이라는 숫자보다 저에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합의 구조 자체였습니다. 배상이 아니라 크로스 라이선스와 공급 계약, 지분 투자로 설계된 이 합의는 분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협력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앞으로 삼성이 이 1조 원의 수업료를 기술 자립 투자로 연결할 수 있을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