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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역대급 현금이 쌓이던 시절,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은 "번 돈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 불과 몇 달 뒤 같은 질문이 기업이 아닌 정부에게 도착할 줄은 몰랐습니다. 반도체 호황이 만든 세수 급증분을 저수지처럼 적립해두는 '미래대응기금' 구상이 발표됐습니다. 방향은 타당하지만, 저수지의 가치는 설계도가 아니라 규율에서 판가름납니다.
재정안정화 저수지, 구조가 얼마나 탄탄한가
시장을 오래 들여다보다 보면 같은 원리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업이 FCF 연동 환원 정책을 도입할 때 시장이 박수를 치는 이유는 규모 때문이 아니라 규칙 때문입니다. FCF 연동 환원 정책이란, 잉여현금흐름(Free Cash Flow)이 늘어날수록 주주환원도 자동으로 늘어나는 구조를 말합니다. 자의적 결정이 아니라 공식이 작동한다는 신뢰가 핵심입니다.
이번 미래대응기금도 구조적으로는 그 논리를 따릅니다. 내국세 결산액의 최근 10년 연평균 증가율을 장기 추세치로 정하고, 실제 세수가 이를 초과하면 초과분을 기금으로 쌓고 반대로 부족하면 기금에서 꺼내 씁니다. 재정의 변동성 완화를 위한 재정안정화 장치로 설계된 것입니다. 재정안정화 장치란 경기 사이클과 무관하게 지출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완충 구조를 의미합니다.
제가 이 구조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추세치"의 산정 방식입니다. 10년 연평균 증가율을 기준선으로 삼는다는 것은, 슈퍼사이클 구간의 급등분이 추세로 굳어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한 장치입니다. 노르웨이 정부연금기금(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이 석유 수입을 바로 쓰지 않고 장기 수익률 기반으로 운용하는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출처: Norges Bank Investment Management). 자원 호황의 과실을 미래로 이연하는 모델을 세수에 적용한 셈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수치를 뜯어보니 전제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초과세수의 원천이 두 반도체 기업의 실적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언급한 2027년 국세수입 500조 원 이상이라는 수치, 그리고 여기서 추세 적용치를 뺀 초과분이 70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추산은, 메모리 사이클이 꺾이지 않는다는 가정 위에 서 있습니다. 메모리 사이클이란 D램과 낸드 등 메모리 반도체의 수급 균형이 주기적으로 공급 과잉과 공급 부족을 반복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사이클이 꺾이면 저수지에 물이 차기도 전에 방류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 기금 적립 조건: 내국세가 10년 연평균 추세치를 초과하는 경우
- 기금 방출 조건: 내국세가 추세치를 하회하는 경우 일반회계로 전출
- 추가 수입원: 매년 9월 세입 재추계 초과분, 세계잉여금 잔여재원, 여유자금 운용수익
- 기금 총액 전망: 교육교부금 이전분 20조 원 이상 포함 시 100조 원 초과 가능성
자본배분 원칙과 교부금개편, 진짜 시험은 규율이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 좋은 자본배분 계획이 실패하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배분처가 너무 넓어서 사실상 아무데나 쓸 수 있게 된 경우였습니다. 이번 기금의 4대 중점 투자 분야는 청년, 성장동력, 지방, 교육·인재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네 가지를 동시에 담는 기금은 전략적 투자 플랫폼이라기보다 제2의 일반예산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배분처가 사실상 전 분야를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성장동력 계정에서는 인공지능(AI), 소형모듈원자로(SMR), 핵융합, 재생에너지 등 7대 SEED 기술이 투자처로 지목됩니다. SMR이란 기존 대형 원전 대비 출력 규모를 줄여 모듈화한 소형 원자로로, 건설 기간과 비용을 낮출 수 있어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 항목을 주목하는 이유는, 에너지 전환과 AI 인프라 수요가 맞물리는 구간에서 SMR 투자가 재정적 수익보다 산업 생태계 구축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단, 이 판단이 규칙이 아닌 재량으로 이뤄진다면 정권마다 우선순위가 뒤바뀔 수 있습니다.
이번 개편에서 제가 가장 무게를 두고 읽은 부분은 교부금개편입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내국세 연동구조가 55년 만에 폐지됩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란 중앙정부가 내국세의 일정 비율을 자동으로 교육 목적 재원으로 지방에 넘기는 제도로, 지금까지는 내국세의 20.79%가 자동 배정됐습니다. 앞으로는 3년 연평균 경제성장률과 변화율을 반영한 새 산식으로 바뀌고, 기존 20.79% 배정액과의 차액은 기금 내 교육·인재계정으로 편입됩니다(출처: 교육부).
최교진 교육부 장관은 교부금이 전년도보다 줄어들 경우 국가가 반드시 보전하도록 법률에 명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제가 직접 이 발언을 들으며 든 생각은, 약속의 내용보다 약속이 어떤 형태로 법제화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발표 나흘 만에 뒤집힌 세제개편안을 지켜본 입장에서, 선언이 법조문으로 고정되지 않으면 다음 정권에서 언제든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지방교부세는 기존 연동 구조를 유지하되 기금 적립금을 제외한 내국세의 19.24%를 넘겨받는 방식으로 모수가 조정됩니다. 단기적으로는 지방교부금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고, 기금의 지방계정으로 일부를 보전하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지방계정 배분이 보통교부세처럼 용도 비지정 일반재원으로 일부 지원되더라도, 나머지는 중앙이 용도를 정한 조건부 재원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방 자율성 측면에서 실질적 후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래대응기금은 언제부터 실제로 운용되나요?
A. 정부는 2025년 7월 24~28일 관련 패키지법안을 입법예고하고, 9월 3일 내년도 예산안과 함께 국회에 제출할 계획입니다. 국회 심의와 법안 통과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실제 운용 시점은 2026년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Q. 기금 규모가 100조 원이라는 근거는 뭔가요?
A.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언급한 2027년 국세수입 500조 원 이상이라는 수치를 전제로, 10년 추세치를 초과하는 추가세수가 약 70조 원, 교육교부금 산식 변경으로 이전되는 재원이 20조 원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여기에 초과세수 등을 더하면 100조 원을 넘는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만 이 수치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유지된다는 전제 아래의 추산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Q. 교육교부금 연동제가 폐지되면 교육 예산이 줄어드나요?
A. 교육부는 연동제가 폐지되더라도 총액과 1인당 교부금은 오히려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기존 20.79% 배정액과 새 산식 적용액의 차액을 기금 내 교육·인재계정에 담아 보전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약속이 법률로 어떻게 명문화되는지가 관건이며, 현재는 최교진 교육부 장관의 선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Q. 미래대응기금과 국부펀드의 차이는 뭔가요?
A. 국부펀드는 외환보유고나 자원 수출 수익 등을 해외 자산에 투자해 장기 수익을 추구하는 기금입니다. 반면 미래대응기금은 국내 세수 변동성을 완충하면서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 등 국내 정책 재정사업에 투입하는 구조로, 투자 수익보다 재정 안정성과 전략적 지출이 주목적입니다.
결론
제가 이 기금 발표를 보며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문제의식은 맞고, 구조 설계도 나쁘지 않지만, 저수지의 진짜 시험은 세수가 줄어드는 첫 번째 해에 온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사이클이 있는 수입원에 기대는 주체의 실력은 버는 국면이 아니라 번 것을 다루는 국면에서 드러납니다. 이 기금이 재정안정화 장치로 제 역할을 하려면 적립과 방출의 기준이 규칙으로 고정되고, 그 규칙이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좋은 설계도라는 평가는 유보하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과 첫 번째 세수 부족 국면에서의 실제 작동 방식을 지켜볼 생각입니다. 그때 이 저수지가 재정 규율의 산물인지, 아니면 대형 예산 바구니에 새 이름을 붙인 것인지가 판가름날 것입니다.